작성일 : 09-02-10 02:05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어긋맞겨 축복한 의미
 글쓴이 : 임마누엘
조회 : 9,687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어긋맞겨 축복한 의미
(믿음으로 계승되는 장자권)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한 첫 번째는 의미는
잃어버린 아들 뿐 아니라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었다는 것이다.

믿음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한다.(에서와 같이 되어선 안 된다.)

야곱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의 여정의 시작과 마지막을 아시고
보상하시고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 가장 완벽한 온전하신 하나님의 위로을 알 수 있다.

믿음의 삶을 위하여, 복음전파를 위하여 잃어버린 것을 백배나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완벽하신 위로 (선교함으로) -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로 인하여 받게 된다.

둘째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한 것은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요셉의 꿈을 통해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계시에 복종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미 요셉이 어릴 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였지만 야곱은 죽는 순간에 그것을 기억해 내었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스라엘 교회를 구원 할 자로 세우셨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중심한 삶!

그래서 요셉이 비록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던 그 꿈대로 그 앞에 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권위, 언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곧 믿음의 행위이다.

셋째, 야곱은 이로써 나이를 초월한 영적 장자권을 요셉에게 물려주고 있다.

영적 장자권은 믿음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성도가 되어지고, 교회가 되어진 자들, 우리들은
믿음으로 영적 장자권을 계승한 자들이다.

야곱의 믿음의 여정은
그 어느 믿음의 조상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장엄하고 많은 부분에 걸쳐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많은 야곱의 행적들 중에서
야곱이 자신의 손자요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는 사건을
그것도 장자와 차자에 대하여 순리적이 아니라 손을 엇갈려 얹어 축복한 사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 사건 속에는 엄청난 믿음의 비밀이 숨겨져 있지만
실제의 생활과 삶에서도 야곱의 축복대로 하나님께서는 성취시켜 주시게 된다.
후에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 지파에서 여호수아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나타나고
유다 지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류의 구원자가 나오게 되었다.

모세에 이어 두 번째 사사가 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진입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군인, 즉 20세 이상 장정이 60만 1,730명이었으니
전체 인구는 대략 200만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와 아이성과 기브온을 점령한 여호수아는
그가 죽기 전에 아직 다 점령하지 못한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나누었다.
갈렙에 대한 예우로 우선권을 얻은 유다지파는 아브라함의 근거지였던 헤브론 일대를 받았다.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는 야곱의 우물이 있는 지역을 차지하여
그 곳에 성막을 설치하고 그 곳을 “실로”라고 하였다.

에브라임 출신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에브라임 지파는 계속해서
열두 지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했으나 시간이 가면서 그것이 여의치가 않았던 것 같다.

사사들을 살펴보면
옷니엘은 유다지파였고, 에훗은 베냐민 출신이었으며,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였고
도도는 이사갈 지파, 엘론은 스불론 지파, 삼손은 단 지파였다.
그러나 성막이 실로에 있었으므로 에브라임은 모임의 중심이었고
그 주도권 때문에 자주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장자권을 둘러싼 유다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즉 요셉지파의 갈등은
예수님의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은 유다지파의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야곱이 믿음으로 손자들을 축복한 것은 그 손자들을 아들의 계열에 올려놓는 의미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자기의 아들들과 같은 각각 지파의 우두머리가 되게 해주었다.

그것의 증거로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각각 야곱의 아들들과 같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의 대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삭의 결혼과 야곱의 결혼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아내를 얻는 것은 장자권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셉이 장자권을 물려받고
그의 아들들이 장자권을 물려받는 것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이 축복한 요셉은 이방여인과 결혼했으며
요셉의 아들들, 야곱의 손자들은 이방인의 여인을 통해 애굽에서 태어났다.

물론,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얻어서 부모의 근심이 되고 장자권을 박탈당한 것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모든 백성의 구원자가 되어
아내를 얻은 것과는 그 각도가 다르다.
하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는대로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겠다.

오늘은 우선 믿음장이라고 하는, 본문에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교훈하고자하는 주된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비록 이들이 애굽에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의 회중의 하나로 맞아들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 담겨진 중요한 진리는
장자권이 믿음으로 계승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 되어지는 것도 역시
믿음으로라는 원리가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눅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야곱은 장자권을 요셉에게로 넘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을 다시 장자가 될 자로 축복하였다.

(창48:17-20)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여기에서 또 하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가 등장한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만큼 중요한 내용이 내포되어져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얹기 쉽도록 장자와 차자의 위치를 정했지만
나이가 많아 거의 실명상태에 있었던 야곱은 의도적으로 그 손을 엇갈리게 올려서 축복하였다.

앞에서 살펴 본 바도 있지만 성경의 역사를 보면 에브라임 족속은 다른 족속들보다 월등하였다.
어떤 면으로 보면 다른 족속들은 에브라임 족속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고
에브라임이라는 이름 아래에 다른 부족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에는 그들이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과연 야곱은 무엇을 보고 차자 에브라임이 장자 므낫세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축복했을까?

오늘 읽은 믿음장 본문에서는 분명히 이 야곱의 행동을 믿음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야곱은 늙어 눈이 흐려진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의 머리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연이라거나 야곱 자신이 형의 장자권을 물려받았기에
그것으로 인한 개인적인 감정의 발로라고 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특별하신 의도가 있음을 알수 있다.
성경에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 우리들에게서는 무조건적인 은혜로 나타나고
그것이 “믿음”이라는 실상으로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형이 바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원리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연이라고 결코 말 할 수 없는
너무나도 규칙적인 형태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모습이 발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히11:4).
물론, 이스마엘이 법적인 형이 아니라 종이긴 했으나, 이삭이 이스마엘을 앞선다.
그리고 야곱이 에서를 앞선다.
또한 요셉이 형들을 앞선다.
마찬가지로, 에브라임이 므낫세를 앞선다.
또한 야곱의 막내 아들인 베냐민 지파에서 첫 번째 왕 사울이 나왔으며,
이새의 막내(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이 그 형들을 앞선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도 언제나 동생이 형을 앞서며, 나중에 부른 자가 먼저 부른 자를 앞선다.

여기까지 설명이 되었다면 우리가운데서는
어째서 야곱이 그 손자들의 머리에 손을 엇갈리게 해서 얹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장자권이 계승되는 것은 우리에게서는 믿음이라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결론은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임을 보여준다.

 적용)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확신하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등식이 야곱의 축복에 성립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야곱의 축복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야곱이 그 손자들을 축복하는 행동에는
오늘 여기 앉은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믿음으로 장자권을 이어받은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임을 증거하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할 때
오른 손을 차자 에브라임에게 얹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에게 얹은 것은,
장차 동생격인 후에 태어난 이방의 교회가 형격인 유대 교회보다
더 많은 구원의 복과 아울러 더욱 풍성한 복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몸 된 교회가 세계를 교구로 하여 복음을 전하고
온 천하를 구원하는 장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장자권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언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예언은 결국 오늘날에 와서 세계 방방 곳곳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장자권을 계승함으로 성취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지고
장차 하늘에 기록한 장자의 총회에 참여하게 되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어질 것이라는
이 야곱의 축복, 야곱의 믿음을 3694년이 지난 오늘
여기 앉은 우리 임마누엘선교교회 성도들이 바로 우리들이 성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세계를 교구로 하여 선교” 함으로서
복음의 장자권을 계승 발전시켜가는 것은
우리의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요,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 야곱의 축복 사건은 말 그대로 먼저 되고 나중 되고의 차원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섭리로 인하여 복음의 장자권을 계승하게 된 차원을 말씀하고 있다.
야곱은 요셉을 장자권자로 임명함으로써 참된 영적 장자권은
나이를 초월할 뿐 아니라 믿음의 원리 위에 기초해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요셉의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다시 차기 장자권자로 임명함으로써
장자권의 기초가 되는 이 믿음의 원리마저도
철저히 여호와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선택 위에 기초해 있음을 다시 보여주었다.

먼저 되고 나중 되고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적용)
그러기에 내가 먼저 되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오히려 나중 되지 않도록, 자신의 믿음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믿음을 잘 지키고,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또, 열심히 앞서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이기에
전적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조건일 뿐이다.

내가 나중이었는데 먼저 되었다고 해서 역시 더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앞선 것처럼 아차하면 역시 뒤처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
뒤처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늦게 시작했는데도 앞서 달리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이기에
먼저 된 자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더 납작 엎드려 겸손하게 순종해야 한다.

장차 우리 모든 성도들이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하게 되는 유일한 기초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히12:24)를
 믿는 믿음이 아니던가?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장차 장자의 총회에 모일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의 장자권을 이어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되어진 것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사람 되어진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게 된 것,
천국과 지옥을 믿고 천국 갈 줄 믿는 것,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는 것,
이 믿음이 나에게 있지만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그 믿음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오늘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서 거론하고 있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의 한결같은 믿음의 고백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자신들이 이렇게 믿음의 사람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장자권자들로서 살아가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임을 확신하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히11장 믿음장의 주제는 믿음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자신이나 믿음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믿음의 삶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에브라임을 축복한 야곱 역시
형 에서와는 달랐던 자신의 믿음을 따라 장자권을 수여받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 믿음 역시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오늘 야곱이 믿음으로 손자들을 축복하는 사건 속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비밀은
믿음으로 계승되는 장자권 즉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이 진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라는 것이다.

(롬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실제로 야곱이 축복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마치 자신이 큰 제국의 황제나 된 것처럼 그들에게 유업을 할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야곱의 축복을 받은 후손들의 실제의 삶은 어떠한가?
전 세계로부터 미움을 받고, 흩어져 유리방황했고,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당했고
지금도 세계평화의 암초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오늘 믿음장에서 증거하고 있는 축복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바라보는 불신의 시각, 육신의 시각으로는
절대로 그 비밀을 알 수 없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아 영안이 열린 자만이 알 수 있고,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축복이요 믿음의 축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믿음, 야곱의 손자 축복 사건은 믿음으로 인한 축복이요,
믿음을 통한 축복이요, 믿음으로 받아 누리게 되는 축복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한 것은 믿음으로 계승되는 하나님의 장자권의 축복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계승되는 믿음의 장자권이요, 영적인 축복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로 이어지는 위대한 믿음의 선언인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되시길 축원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장자권을 계승하시길 축원한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확실히 믿어
자신의 아들, 손자들에게 야곱처럼 믿음의 축복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