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2-10 01:41
야곱이 손자들에게 축복한 것에 대한 고찰(2)
 글쓴이 :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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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초월한 영적 장자권을 요셉에게 물려주고 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은 장자권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실 야곱의 인생 전체는 장자권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곱의 인생과 장자권은 뗄 수 없이 밀착되어 있다.
또한 족장 언약 시대의 장자권은 중보적 위치와도 관련되어 있다.

시내산 언약 이후에는 제사장과 선지자가 중보자로 대두되지만,
족장 언약 시대까지는 장자권자가 동시에 언약의 중보자들이기도 했다.
또한 장자권은 상속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신21:15-17)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소생이 장자여든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이와 같이 장자는 두 몫을 상속받는다.

(왕하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한 한 소원은
“당신의 영(선지자에게 임하신 성령)의 두 몫 (장자의 상속) 이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는 뜻이다.
즉, 이는 “내가 당신의 장자가 되어 당신의 선지자직을 상속받기 원합니다”는 뜻이다.

야곱은 혈통적인 장자가 진정한 장자가 아니라 믿음의 장자가 참된 장자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자기의 혈통의 형 에서 대신 장자가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었다.

야곱의 혈통적인 장자인 르우벤은
그 아비 야곱의 여자(첩)인 빌하를 건드림으로써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다(창49:3-4).
또한 둘째와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인 성례(할례)를
인간적인 복수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다(창49:5-7).

야곱은 이제 혈통의 순서를 넘어 믿음의 원리에 따라 장자를 선택하여 “죽을 때에”(히11:21),
다시 말하자면 죽기 전에 요셉에게 장자권에 속한 두 몫의 상속을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이어지는 장자권은 유다지파에 있다.

야곱은 유다에게 장자권을 상징하는 축복을 했다.
(창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 나오는 실로라는 말은 메시야를 뜻한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의 차례가 되자 요셉에게도 동일하게 장자의 축복을 한다. 이중 축복의 구도이다.
(창 49: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이 야곱의 축복은 이스라엘 역사에 커다란 분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 분쟁의 씨앗은 순전히 우리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고 적용할 때이다.

어쨌든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과 에브라임이 장자권자였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다윗 왕을 배출한 유다가 장자권자가 아닌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의문은 구속 역사 속에서 쉽게 풀린다.

야곱은 분명 요셉과 에브라임을 장자로 축복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창49:8-12)동시에 유다에게서 왕적인 메시아가 나올 것도 예언했다.
이 축복 역시 유다를 장자권자로서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야곱의 이 예언은 구속 역사 속에서 양쪽 모두에게 성취된다고 할 수 있겠다.

야곱의 예언 속에서 유다가 온전히 장자의 권위를 수행하게 되는 때는
“홀”, “치리자의 지팡이”, “실로”가 올 때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긴 하지만,
이 예언은 우선적으로 다윗 왕의 등극으로 성취되었다.

에브라임이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 이전이다.
성경은 다윗 왕의 출현 이전까지 에브라임 지파가 계속 장자권자로서의 위치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왔다는 것 때문에
에브라임 지파의 장자권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근거 구절이 있다.

(대상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비록 창49장에서 야곱이 유다에게서 왕(주권자)이 나올 것을 예언하긴 했으나,
그것이 곧 유다가 곧바로 장자권자로서의 행세를 하게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후계자로 에브라임 지파의 족장이었던 여호수아(호세아)를 지명하셨다.
또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시기 이후에 사사 시대 중에서도
에브라임 지파는 계속 장자권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에브라임 지파는 사사 기드온과 사사 입다가 자신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장자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고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교회를 보호하는 권세자로서의)

삿 8:1절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과 크게 다투었다는 말씀이 나온다.
기드온의 경우에는 에브라임 지파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삿 12:1-7에 의하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입다와 다투고 입다는 길르앗 사람을 모아서
에브라임과 전쟁을 하여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 명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암몬 자손과 싸울 때 불렀지만
당연히 와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구원해야할 장자 에브라임 족속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입다는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던 이 불신앙적인 장자 지파를 심판하였다.

이상과 같이 사사 시대에도 에브라임은 장자 지파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장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린 채,
그 권리만 주장하였던 것이다.

시편은 이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시78:9)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사사 시대에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을 사사들이 대신 수행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장자권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해낸 사사들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시78편의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중간 부분은 출애굽 이후부터 사사 시대까지,
즉 다윗 왕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역사와
장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에브라임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곧 장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의 불신앙도 포함되어있다.
아니,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책임을 장자 족속인 에브라임의 책임으로 돌리고
장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에브라임을 심판하며 에브라임에게 있는 장자권을 박탈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에브라임 지파 대신 유다 지파와 다윗을,
실로의 성막 대신 예루살렘(시온)을 선택하실 때가 왔음을 선언함으로서 이 시편은 끝난다.

이 시편은 장자권의 촛대가
에브라임에서 유다와 다윗왕가로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편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그동안 예배의 중심지로 생각했던 실로와 성막 대신
예루살렘으로 그 촛대가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편이기도 하다.

이 시편은 이를 통해 참된 왕이 그동안의 장자 지파로 행세한 에브라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는 매우 정당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에브라임의 장자권 박탈에 대한 말씀 바로 앞에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78:59-66)

그 가운데 이 시편의 61절은 매우 중요하다.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표현에서 “그 능력된 자”를 직역해보면 “그(여호와 자신의) 능력을”로 번역된다.
이렇게 볼 때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를 그대로 번역해보면
“그 여호와의 능력이, 여호와께서” 포로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즉, 이 구절은 여호와께서 일시적으로 그 대적에게 포로로 잡혀가셨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바벨론 포로가 아니라 홉니와 비느하스 때에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사건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가신 것(언약궤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셨고, 친히 고난 당하셨다.

이것은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의 죄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처럼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는 장면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장자권과 관련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다윗 왕의 등극으로 인해
에브라임에게 있던 장자의 촛대는 구속 역사 속에서 유다 지파에게로 넘어간다.

(참고적으로 장자와 관련된 말씀들을 살펴보자.)
성경에서 첫 열매(식물)와 장자(사람), 그리고 초태생(동물)은 모두 같은 단어이다.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동물과 식물은 종종 사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사법이 그 대표적인 실례)

신 14:22-29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규례는
사실 첫 열매(장자)를 드리는 것과 관련하여 설명되는데, 이는 십일조가 장자 규례임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 나타난 십일조는 실제로 3/10으로 3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
(신 14:22, 14:23-27, 28-29)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는 실제로 3종류의 장자 지파가 발생했다.
하나는 에브라임, 다른 하나는 유다이며, 나머지 하나는 레위 지파이다.
(애굽에서 살아난 장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짐)

이상과 같이 장자에 관련된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장자, 장자권에 대한 결론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장자는 혈통의 순서가 아닌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이다.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하는 사건은 바로 이 믿음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믿음의 원리에 따라 축복하는 야곱의 축복을
야곱의 믿음을 대표하는 것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다.
야곱의 축복은 “오직 믿음”의 원리, “믿음 우선의 원리”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야곱의 축복은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실례가 된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 믿음 우선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를 믿는 이 믿음의 본이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심(믿으심)으로써
자기 앞에 놓여진 고난의 잔을 다 받으셨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나이 때문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길을 통해 “잠자는 자들 가운데 첫 열매(직역하면 장자)”, 즉 우리의 장자가 되셨다.

(고전15: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또한 본문 바로 다음 장(히12장)에 있는 성경은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그 일부가 아닌 모두가 “장자들의 총회”에 이르렀다고 말씀한다.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장자들이다.

(히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오늘날의 믿음의 성도들은, 이 자리에 앉은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어지는 장자권을 믿음으로 계승하고 전수받은 자들이 틀림없다.
오늘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요
복음전파의 사명을 계승하고 이어가야 할 복음과 교회의 장자권자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교회를 보호하고 구원해내야 할 사명이 있다.